인왕산 자락에서 40년 가까이 이어온 중화요리의 기억…가족의 잔치와 사람들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인 부암동의 문화공간
서울 종로구 부암동으로 향하는 길은 이상하게 걸음을 조금 늦추게 한다. 경복궁과 청운동을 지나 자하문고개를 넘으면 서울 한복판이라는 사실이 잠시 낯설어진다. 인왕산과 북악산의 능선이 가까워지고, 오래된 주택과 작은 미술관, 카페와 골목길이 나타난다. 도심의 속도보다 산동네의 시간이 먼저 느껴지는 곳, 그 길 한쪽에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약속 장소가 되어온 하림각이 자리하고 있다.
하림각을 단순히 ‘유명한 중국집’이라고 부르면 어딘가 부족하다. 이곳에서 음식은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배경이다. 부모의 생신을 축하하고, 두 집안이 처음 인사를 나누고, 아이의 첫돌을 기뻐하고, 오랜 친구들이 다시 모이는 동안 둥근 식탁 위로 요리가 한 접시씩 놓인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이어진 만남의 시간이 하림각이라는 공간을 조금씩 만들어왔다.
1987년 부암동에서 문을 연 하림각은 30년 넘게 자리를 지키며 대형 중식당과 연회 공간으로 이름을 알려왔다. 한때 최대 3000여 명을 수용할 만큼 규모가 커지면서 부암동의 대표적인 장소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고, 급기야 주변 버스정류장에도 ‘하림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2021년 코로나19 여파로 한동안 영업을 중단하며 지역의 상징 같은 공간이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아쉬움도 컸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문을 열어 손님을 맞고 있다.
자하문고개를 넘어 만나는 ‘오래된 서울’
하림각에 가는 길부터 하나의 짧은 여행이다. 종로의 번잡한 중심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풍경은 금세 달라진다. 부암동이라는 이름은 과거 이 일대에 있었다는 ‘부침바위’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나이만큼 작은 돌을 문지른 뒤 바위에 붙으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믿었다. 바위 자체는 1970년 무렵 도로 확장 과정에서 사라졌지만, 그 흔적을 알리는 표식은 하림각 맞은편 부암동 경로당 인근에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들어서면 부암동의 오래된 이야기가 음식점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높은 건물과 유리벽이 만들어낸 요즘의 외식 공간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중국풍의 장식과 넓은 홀, 원형 식탁, 독립된 룸이 이어지면서 한 시대의 연회 문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세련됨이라는 말을 반드시 ‘새것’과 연결할 필요가 있을까. 하림각에는 오히려 오래된 공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묵직함이 있다. 많은 사람이 오가고, 수많은 축하와 만남을 지켜본 장소에서만 느껴지는 분위기다.
둥근 식탁에서 완성되는 중국요리의 시간
하림각의 식사는 서둘러 한 그릇을 비우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이곳의 중심은 코스요리다. 현재 ‘행(幸)’과 ‘복(福)’, ‘정(情)’, ‘감(感)’을 비롯해 매(梅)·난(蘭)·국(菊)·죽(竹) 등 이름을 붙인 여러 단계의 코스를 운영하고 있으며, 냉채와 해산물·육류요리, 새우요리, 식사와 후식 등이 차례로 이어진다.
음식 한 접시가 비워질 때쯤 다음 요리가 등장하고, 그 사이 대화가 이어진다. 이것이 중식 코스의 재미다. 누군가는 탕수육 한 점을 건네고, 누군가는 앞접시에 새우를 덜어준다. 원형 테이블이 천천히 돌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과 이야기도 함께 움직인다.
하림각을 찾은 방문객들의 기록에서도 ‘가족모임’, ‘상견례’, ‘어른들과의 식사’, ‘개별 룸’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음식의 맛만을 평가하는 장소라기보다 여러 세대가 한 식탁에 앉을 수 있는 공간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뜻이다.
중국요리는 본래 함께 먹는 음식의 성격이 강하다. 커다란 접시에 담긴 요리를 여러 사람이 덜어 먹으며 식사가 진행된다. 하림각에서는 이런 중국음식의 공동체성이 공간과 더욱 잘 어울린다.
식당 안에 그림과 꽃, 그리고 연회의 기억
하림각을 ‘맛집’을 넘어 ‘멋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공간에도 있다.
공식 소개에 따르면 이곳에는 서로 다른 분위기로 꾸민 13개의 소연회장이 있으며, 천연 마블과 중국풍 소품, 유명 화가의 작품, 생화 장식을 활용해 실내를 문화예술 공간처럼 연출하고 있다. 봉황홀과 공작홀, 국화홀을 비롯해 대규모 연회와 기업행사 등을 위한 여러 공간도 함께 운영된다.
그래서 식사를 마친 뒤에도 눈길이 오래 머문다. 벽에 걸린 작품과 장식품, 복도 끝의 조명, 창밖으로 보이는 산자락이 하나의 장면이 된다.
최근의 외식문화가 ‘사진 한 장 잘 나오는 식당’을 찾아 움직인다면, 하림각에는 그보다 조금 다른 종류의 장면이 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은 원탁에 앉고,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 사진을 찍으며, 결혼을 앞둔 두 가족이 조심스럽게 첫 대화를 시작하는 장면이다.
그것 역시 서울의 생활문화다.
정치·경제·문화계 사람들이 오가던 부암동의 사랑방
오래된 대형 음식점에는 자연스럽게 도시의 역사가 스민다.
하림각 역시 지난 세월 동안 가족행사는 물론 기업모임과 각종 연회가 열리면서 정치·경제·문화계 인사들의 모임 장소로도 알려져 왔다. 온라인에 남아 있는 방문기에서도 하림각을 두고 한때 여러 분야 인사들의 모임이 이어지던 곳이었다는 회고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음식점의 역사는 메뉴판에만 기록되지 않는다. 누가 이곳에서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대부분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같은 자리에 존재한 식당은 자신도 모르게 도시의 기억을 보관한다.
그래서 오래된 음식점 하나가 문을 닫는다는 것은 단지 식당 하나가 사라지는 일이 아니다. 지역의 추억과 개인의 생애사가 함께 사라지는 일이기도 하다.
2021년 하림각의 영업 중단 소식이 알려졌을 당시 ‘부암동의 랜드마크가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던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맛집에서 멋집으로, 다시 ‘문화가 있는 집’으로
오늘날 맛집의 유행은 빠르다. 새로운 식당이 문을 열고 SNS에서 화제가 됐다가 몇 해 지나면 또 다른 공간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나 오래 살아남은 식당은 유행과 다른 가치로 평가해야 한다.
하림각은 화려한 최신 감각만으로 설명되는 식당이 아니다. 오히려 세월을 견딘 공간의 표정과 여러 세대의 추억, 중국요리 특유의 나눔 문화, 그리고 부암동이라는 동네의 분위기가 겹쳐져 만들어지는 장소에 가깝다.
창밖으로 인왕산 자락이 보이고, 원탁 위에서는 따뜻한 요리가 김을 피운다. 식사를 마친 가족들은 복도를 천천히 걸어 나오고, 또 다른 방에서는 새로운 모임이 시작된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림각의 진짜 메뉴가 음식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시간, 축하와 위로가 오갔던 기억, 그리고 서울이라는 도시가 지나온 한 장면까지 함께 차려내는 곳.
부암동 하림각은 그렇게 맛집과 멋집을 넘어, 오래된 서울의 이야기가 아직 식탁 위에서 살아 숨 쉬는 하나의 문화공간으로 남아 있다.
현재 하림각은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255에 있으며 공식 안내 기준 수~금요일은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3시, 오후 5시30분부터 9시까지, 토·일·공휴일은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3시, 오후 4시30분부터 9시까지 운영한다. 주문 마감은 오후 8시이며 2026년 1~10월에는 월·화요일을 정기휴무로 안내하고 있어 방문 전 확인하는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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